• Yum Joonho, Nouvelles Frontières, Installation View, ONE AND J.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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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궁극의 사진을 위해 조용히 움직여 가는 사진예술가처럼 내게도 그런 장면들을 다 붙잡아둘 수 있는 머릿속의 카메라, 광기의 카메라가 한 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건 그대로 하나의 서사시가 될 것이다.
— 잭 케루악, 로버트 프랭크와 플로리다 가는 길 1958, 김우룡 역.

사진가는 세계를 어떻게 보는가? 카메라를 통해서? 아니다. 사진가는 먼저 맨눈으로 세계를 본다. 그 다음에 카메라를 들고 파인더를 통해 세계를 본다. 본 다음에는 물론 찰칵, 셔터를 누른다. 또 한 번 누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 장의 사진이 찍힌다. 염 중호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가 본 것을 사진으로 찍고 골라서 전시한다. 누구나 그렇듯이.
염 중호가 본 세계는 지리적으로 한국에서 유럽까지 이른다. 거리는 멀고, 면적은 넓지만 사진 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다. 염 중호의 사진들은 특별히 공간의 다름과 문화적 차이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사진들은 유렵이나 한국을 대표하는 이미지들을 슬쩍 피해간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의 사진들은 장소를 지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은 유럽처럼 보이고, 유럽은 한국의 일부 같다.
물론 그런 까닭에는 형식적인 일관성 혹은 유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대형 사진들이 보여주는 엄격하고 꽉 짜인 구도와 불필요할 정도의 디테일 묘사를 피해 그의 사진들은 걷거나 달아난다. 염 중호 자신도 그러면서 셔터를 누른 것 같다. 그리고 누른 셔터로 잡은 사물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하게 한다.
염 중호의 사진은 서로 다른 대륙의 문화와 지리적인 차이들을 감춘다. 사실은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구지 감추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풍경, 두 대상들을 서로 닮는다. 아니 닮게 만들었다. 물론 닮게 만드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의 사진들은 사물들의 처지와 상태, 궁극적으로 그것을 본 자신의 시각에 대해 말한다. 그는 변두리에 있다. 세계의 변두리에서 카메라를 들고 본다. 그 변두리의 우연한 구성물들을 거의 무심하게 들여다본다. 스치듯이, 마치 자신이 거기에 없었다는 듯이 바라본다.
시적인 분위기 때문에- 그 시적 분위기는 색채와 사진의 밝기 때문에 오는데-그의 사진은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빅터 버긴이 말하듯 “한 장의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 갈등이 생긴다. 처음 볼 때는 즐거움을 주던 이미지가 시간이 갈수록 점차 그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이 보고 싶어지는 베일로 변한다.”
염 중호의 사진도 그렇다. 그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사진 내부에 새겨진 상처들이 보인다. 그 상처들은 밑동만 남기고 베어진 나무나, 뿌리째 뽑힌 나무, 혹은 풀밭에서 썩어가는 과일들처럼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진의 대다수는 문자 그대로 베일이 된다. 흰 바탕위의 전기 콘센트, 로봇 같은 쓰레기 차, 거대한 콘돔 같은 쓰레기 봉지, 벽에 걸린 스노클 장비 등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베일이다. 그 베일은 사물들, 그 사물들을 드러내고 있는 사진의 표면 너머 도대체 무엇이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사진의 표면 너머 물론 우리는 현실이, 사진 이미지를 만들어 낸 시스템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던 우리는 희미한 고통을 느낀다. 현실과 시스템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사물을 통해 드러나는 근원적인 것이어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불편한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의 시선은 가볍게 흔들린 채로 다음 사진으로, 다음 사진으로 넘어간다. 넘어가면서 사진의 파편성 때문에 부서진 이미지들이 자기네들 끼리 접합되는 것을 깨닫는다.
빅터 버긴은 또 말한다. “사진이 오래 보지 못하도록 배치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가 아는 만큼 흘끗흘끗 보고 지나가는 식으로 사진들을 대한다.( 어느 국립미술관 직원이 관람객들의 뒤를 따라가며 한 작품을 보고 있는 시간을 스톱워치로 쟀더니, 표준적인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의 길이와 동일하게 평균 10초였다)”
그 10초의 시간 동안 우리는 사진을 보고, 사진과 사진 사이를 이어 서사적 구조를 만들려고 한다. 물론 염 중호의 사진은 어떤 확실한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오히려 단편적이고, 그 단편적인 것들은 반복 된다. 반복 되면서 차이를 만든다. 차이와 반복이 되풀이 되면서 사진과 사진의 경계가 지워진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면 지속적으로 이미지 사이에서 결코 끝이 보이지 않는 차연 이 이루어진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은 세계를 설명해주거나 지시하지 않고 막막하게 만든다. 염 중호는 마치 세계를 어떻게 읽어야할지 모르는 것처럼 그는 카메라 뒤에 서있다. 이것이 계산된 관광객 적 시선과 결합해 무심한 태도를 낳는다. 당연히 이것은 전략이다. 전략적 무심함, 우연히 마주친 것을 그냥 찍은 것 같은 구성 방식은 사진이란 무엇이었던가, 무엇인가를 되묻게 만든다.
레비스트로스를 빌자면 사진은 구체의 과학인 원주민들의 사고와 닮았다. 그는 구체의 과학이 신화적 사고라고 말한다. 그리고 신화적 사고는 표상image에 묶인 채 지각percept과 개념 concept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우리에게는 표상으로 밖에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화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나름으로는 과학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따른다면 사진은 이미지이므로 지각과 개념의 사이에 있고 신화적 사고의 일부이다. 지각과 개념 사이의 지점은 추상화 이전의 상태이다. 그러므로 사진은 구체적이다.
당연히 구체성은 오래 전부터 지적 되어온 사진의 특성이다. 때로 그것은 사진의 디테일이라든가 표현 방식의 문제로 이야기 되지만, 사실 사진의 구체성은 사물과의 유사성이나 형식적인 묘사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엽적인 것들이며 오히려 중요한 것은 사물과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 즉 시선의 문제이다. 레비스트로스 식으로 말하면 사진의 구체성은 사진가의 시선, 무엇이 기록할 만한- 바라보고 다시 생각할 만한 가치를 갖는가에 의해 결정 된다. 마치 세계 각 지역의 원주민들이 식물에 관해 더 없이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식물을 맛보고, 냄새 맡고, 관찰 하는 것과 닮았다. 염 중호는 그 원주민들처럼 카메라를 들고 주목받지 않는 구체성을 대륙을 건너가서 관찰한다. 그 결과는 구체성의 과학처럼 범주들로 묶인다. 물론 그 범주는 과학의 그것이 아니다. 그 범주들은 브리콜라쥬bricolage적이다.
다 알다시피 브리콜라쥬는 정확한 계획과 엄밀한 제작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주위에서 얻을 수 있는 물건과, 이미 주어진 도구를 이용해 손쉬운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만든다. 그리고 애초의 사물들을 변형 시켜 새로운 범주로 집어넣어 버린다. 염 중호의 사진도 그렇다. 그가 찍어 이미지로 만든 대상들은 지역, 시간을 가로질러 범주화 된다. 그 범주를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이었을까?
사진은 세계에 대한 환유 metonymy이다. 염중호는 사소한 사물들이 이뤄낸 의도하지 않은 브리콜라쥬들을 빌어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염중호의 사진은 이중적인 브리콜라쥬이다. 일차적으로 우연히 브리콜라쥬 된 세계를 다시 동일한 태도로 이미지화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과정에서 효과 또한 증폭된다.
염 중호가 사진 찍은 세계는 무질서하고, 우연에 가득 차 있다. 주차된 자동차 아래 잡초가 자라고, 광장에서는 권투 경기가 쇼처럼 벌어지고, 은장도는 번쩍이며 절반으로 잘린 배에 꽂혀 있다. 그리고 앞에서 말해 듯 이 브리콜라쥬, 환유를 생산한 세계는 말이 없다. 베일을 쓴 세계는 아무리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도 벗겨지지 않는다. 단지 그 베일이 아주 짧게 흔들리는 것을 기록할 수 있을 뿐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었다. ‘과학은 무질서를 견디지 못한다. 그것이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마찬가지이다. 과학자들은 불확실성이나 좌절은 참고 견딘다. 왜냐하면 달리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고 견디지 못하며 또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무질서이다. 이 무질서를 없애려는 노력은 생명의 기원과 함께 저차원에서 무의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사진은 과학이 아니므로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다. 프레임 속의 이미지들이 아무리 형식적으로 정돈 되어 있더라도 그것은 질서가 아니다. 그 질서는 이미지의 형식일 뿐 세계의 질서가 아닌 것이다. 물론 전시장에 걸리더라도 그 결과는 같다. 시각적 위생처리가 잘 이루어진 흰 벽 위에 줄맞춰 걸린 사진들은 단지 줄을 잘 맞춘 이미지들일 뿐 세계의 질서가 아닌 것이다.
염 중호의 작업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서서, 혹은 걸으면서 무질서가 만들어 낸 우연, 그 우연의 배후를 본다. 그는 아마 그것을 즐겼을 것이다. 사진 속에 희미하게 그 파편들을 담아내기 위해서. 아니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들고 단지 이미지들에 반응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읽을까, 어떤 반응과 해석을 할 것인가를 관객에게 떠넘긴다. 보고 해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일초가 됐건, 십초가 됐건 상관하지 않는다. 사진가는 카메라를 들고 구체적인 세계의 파편을 순간적으로 기록할 뿐인 것이다.
강홍구

염중호는 중앙대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하였으며 파리 8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일본, 한국, 파리 등을 오가며 전시하였으며 국내 광주비엔날레 등에 참여하였다. 현재 서울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