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eahyun Lee, Between Red, Installation View, ONE AND J.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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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피하는 길 – 이 세현의 그림에 관하여
유토피아는 이 세상에 없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그 환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림은 유토피아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하고 때로는 디스토피아를 제시하기도 했다. 이 세현의 그림이 보여주는 풍경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겉보기에는 유토피아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그림 속에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인 집들만 보일 뿐 사람이 없다. 아름다우나 사람이 없는 세계는 일종의 디스토피아다. 아니다. 다시 보면 그의 그림은 유토피아이다. 그 유토피아는 미래의 것이 아니라 과거의 것이다. 사실은 과거에도 존재한 적이 없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다시 디스토피아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의 그림은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 사이에 붉은 다리처럼 걸려 있다.
이세현의 그림은 전통적인 한국의 산수화와 서양화의 종합적 교배이다. 먼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식적인 특성이 그렇다. 게다가 그가 그런 그림을 그린 최초 장소가 한국이 아니라 영국의 런던이며, 일반에 공개된 곳도 런던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더욱 흥미로워 진다. 왜냐면 그의 그림의 배후에 있는 고민들이 무엇인지 쉽게 짐작이 가기 때문이다. 동양, 한국을 포함한 중국과 일본, 더 나아가면 유렵과 미국을 제외한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현대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딜레마에 빠져있었다. 정치, 경제 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문화적인 것도 그러했다. 대중문화든 고급문화든 자신의 전통적인 문화와 해외에서 강제로 유입된 문화 사이에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 딜레마, 즉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사용 되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방법이 문화의 형식과 내용을 나누고 거기에 각각 다른 관점을 적용시켜 통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등의 구호가 그것이다. 모두 다 서양의 기술과 전통적인 정신을 결합하여 딜레마를 극복하자는 내용의 이 구호들은 여러 방면에 폭넓게 적용 된다. 그리고 백 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이용되기도 한다. 그림 또한 마찬가지여서 전통적인 재료들을 서양적, 현대적 방법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서양의 재료와 도구를 전통적인 방법으로 사용해왔다. 이세현의 그림들은 후자에 속하며 시간을 더듬어 올라가면 그 계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아마도 유럽, 서양인의 눈으로 볼 때 이세현의 풍경은 오리엔탈리즘적이거나 아니면 이국적인 풍경을 유화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시각에서 이세현의 풍경은 겉보기와는 달리 고통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정체성의 문제와 문화적 딜레마, 작가의 생존에 관한 문제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그의 풍경은 전통 산수화를 닮았지만 산수화는 결코 아니다. 시점들은 다시점과 이동 시점을 취하고 있고 전체적인 구성도 그러하다. 그러나 대상에 관한 묘사 방식은 산수화의 준법이 아니라 서양식 묘사이고 색깔을 붉은색 하나이다. 그 붉은 색은 전통적인 산수화에 사용되던 먹색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좋아했던 색이며 한국에서도 나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로 사용 되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는 분단 상황에서 비롯된 한국 사람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세현의 그림은 형식적인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의도적으로 일관성을 배제한다. 그렇게 해서 이 세현의 작업은 논쟁적인 내용을 풍경화라는 외형을 통해 보여준다. 그는 의도적으로 붉은 색을 택하고, 바닷가 시골 출신으로 자신이 경험했던 한국의 기억-민주화의 고통스런 과정, 경제적 근대화와 분별없는 개발과 건설로 사라진 바다와 섬과 산들을- 서양식 화법으로 그린다. 이는 그의 그림이 현재의 상태에 이른 과정을 보아도 알수 있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린 그의 초기 그림은 도시의 거리에 있는 풀들이다. 그 풀들은 문명 이전, 인간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들이며 인간의 선조들이다. 즉 자연에 대한 경의와 그에 대한 인간의 횡포를 전통을 빌어 말하려 했던 것이다. 그 뒤에 이 세현은 지금의 작업 스타일을 발견한다. 그것은 겸재 정선을 비롯한 조선 시대의 대가들에 주목함으로써 시작된다. 이 세현에게 전통 풍경이란 박제된 파편이 아닌 현재형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세현의 풍경 이미지들은 라캉을 빌어 말하면 상징계의 한 예이다. 질서와 언어로 구조화된 체계인 상징계는 무의식을 반영한다. 그 무의식이 발현된 이 세현의 그림은 전통 산수화의 일종인 관념 산수와 겹친다. 그리고 관념 산수는 유토피아를 담고 있고 그 유토피아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화가는 사소한 디테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모조리 제거한 이상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이세현의 그림은 서양인의 입장에서 일종의 타자이다. 타자로서의 그의 작업들은 서양 중심의 단일문화 mono-culture에 저항한다. 그 저항은 동양, 한국에서는 익숙하지만 서양에서는 낯설 것이다. 낯섬과 새로움을 넘어선 이해에 이르는 길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지만 이 세현이 탐색해야 할 길이 그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길은 그의 그림 속에 이미 그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가끔은 그 길 밖으로 나와야 온전한 길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으며, 또한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아니라 피해가는 길일 수도 있다.
강호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