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m Suyoung, Landscape, Installation View, ONE AND J.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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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중방우도雪中訪友圖
― 꽃, 그리고 그림

문밖에서 서성이며
이 글을 지금, 이천팔 년 양력 사월 열하룻날 아침부터 쓰고 있는 것은, 창경궁 문화해설사가 여남은 명되는 외국인을 앞에 두고 하는 투로 김수영 그림을 ‘해설’하고자 해서도, 구미산 각종 말씀을 외워가며 미학적·비평적 층위에서 ‘해석’하여 김수영 작업의 의미를 ‘옛소!’하며 여러분네들께 안겨드리고자 해서도 아니다. 오늘 김수영 그림은 나에게, ‘저것이 무엇 인고?’ 하는 물음과 앎의 대상이 아니다. 정체를 따져 물어 판단하고 처결하는 이론적 노름에는, 적어도 오늘, 무관심하다. 그의 그림은 그렇게 ‘다루기가’ 싫다. 나한테 문제는, 누구누구의 이른바 작업한다는 세속적 업태와 그것의 향배를 결국은 내가, 내 몸이, 내 마음이 어떻게 ‘겪느냐’ 함이기 때문이다. 저 옛 시절, 17-8세기 조선에 그「설중방우도」라고 있잖든? 거기서 처럼 ‘설중방우雪中訪友’하듯 하면서.
새봄. 꽃.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진달래는 세상을 어떻게 겪기에, 그리고 유려한 문체를 닮은 구붓한 육신 안에서는 겨우내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끝내 꽃망울을 밀어올려 꽃을 터뜨리고야 마는 걸까? 꽃을 통해 그는 세계를 ‘재현’하는 것일까? 흘? 무심결에, 마치 남이 하듯,「봄날은 간다」를 취한 듯 흥얼거리며 새봄을 새삼 앓는 이즈음 4-50대들의 빈 마음과 같은 무엇에서일까? 흘? 그림은 꽃처럼 피어난다? 그림이 꽃같이 터진다? 그림은 언제 열리는가? 봄에? 새봄에? 꽃은 본시 막막한 것. 해마다 겪는 일인데도 이른 봄, 꽃은 무슨 까닭으로 그닿하게도 막막한가(나한테는 이맘때 4월초 살구꽃, 복숭아꽃, 진달래, 제비꽃이 먼저 그렇고, 인제 한 일고 여드레 뒤에는 찔레 새하얀 꽃마저 만나면 막막하다 못해 기어이 눈물까지 글썽이지 않을 수 없다). 그야말로 말을, 잃는다. 잃지 않고 그 앞에서 무슨 말을 지걸이며 지랄을 하랴. 거기서는 잃음이 염치요 법도일 것. 그 앞에서는 근대로부터 빠져나와, 근대의 언어와 주체를 가만 내려놓고서, 그저 가마득한 원시로 줄행랑칠 일. 꽃은 본시 막막한 것. 거기서는 그 냥, 가만, 있을 것. 눈을 감고, 귀는 열고, 몸이 차츰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흡, 김수영 그림을 보다가 별 생각 다 한다. 하지만 사람을 이 지경으로 앓게 하는 것이 그림의 덕德이 아닐는지. 앓으면서 스스로를, 남이 아니라 스스로를 살피고 추스르게 하는 일이 그림의 분수分數라면. 또 한 가지. 그림 그리는 일은 외로움과 떳떳이 맞서는 일일지도 몰라. 외롭다고 해서 “나 외롭다-!” 악다구니 써가며 괜히 옆집을 들쑤시지 아니하고, 안에서 안으로 삭히고 다시 삭혀서 마침내 그 외로움을, 그리고 외로움을 낳은 갖은 인연에 얽혀있는 상처를, 달래고 어루더듬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 일을 주머니 뒤집듯 바깥으로 뒤집어 놓았을 때, 외로움은 그 리움이 되는 것. 외로움은 곧 그리움. 그것은 건너가고자 함, 옮고자 함.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을 때, 그림은 표면을 넘어선다―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세상이 바뀌니 풍습도 바뀐다. 세상도 풍습도 바뀌니 그림도 바뀐다. 예전엔 무엇인가를 화가가 그린다 할 때 대상을 ‘보고’ 그렸는데, 요즈음엔 적잖은 경우에 화가들이 사진을 ‘보고’그린다. 카메라가 재현한 것을 재현하는 것이다. 풍경을 재현하는게 아니라, 풍경을 재현한 풍경(이미지)을 재 현하는 것이다. 재현이든 재현에 대한 재현이든, 거기에 재현대상이 버젓이 살아있는 듯 그리기는 하지만(‘사진’), 재현대상은 재현주체와 메카니즘, 그리고 이들에 대한 해석과 소통과정을 통과하면서 스스로를 초과하거나 초월하게 된다. 말하자면 쉬어터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본이 풍경이 었던 대상은 [곰삭은] 정물, 혹은 기념비가 된다(이 아슬아슬한 이야기는 나중에 도록에 실릴 글에서 좌정하고서 해볼 참이고 오늘은 각설).
이 양반 그림은 생각보다 좀 복잡하다. 작업과정을 추적해보면, 먼저, 그는 르 코르뷔제 건축을 구경(요즘 말로 리써치?)하러 이역만리 마르세이유 같은 데를 가서 건물을 살피고 뜯어 보고 촬영하고 그것도 모자라 거기서 묵기까지 했다. 일종의 사실정신(어째 좀 쉰 냄새가 난다) 같은 것이라든지 진정성, 리얼리티, 좀더 정확하게 풀자면, 거기-그것(바로 그 문맥 속에서 숨쉬고 있는 그 건축)하고 김씨 자신이 생생하게 육신으로 접(肉接)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다는 것. 풍경을 그 문맥으로부터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정물靜物로 축소하지 않고, 풍경으로서 대우하려는 것. 풍경. 비루한 세속적 인연의 꼬임 속에서 비로소 숨을 쉬는 유기체 becoming-in-context.
그 다음, 이번에는 자신의 육신에 새겨진, 현장에서 얻은 기억과 흔적을 되살려가면서도, 결국에는 사진 이미지를 ‘통하여’ 그리고 있다는 점인데, 흥미로운 것은 이미지를 참조하는 것 처럼 보이는 이 몸짓은, 이미지에 기록된 시각적 디테일을 좀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베끼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리기를 지속시키는 몸의 운율(韻律, 리듬)을 잃지 않기 위한 일종의 ‘추 임새’라는 점. 추임새. 마치, 지휘자가 악보를 이따금 훔쳐봐가며 제 육신에 운韻을 불어넣듯. 그림 피부가 얇아보이지만 그의 그림은 아주 섬세한 붓질이 겹겹이 퇴적된 것이며, 한껏 풍요로운 선과 면, 형과 색이 그 붓질과 더불어 춤을 추고 있다. 김씨 그림은 결코 평평하지 않 다. 가까이 다가서서 살피고 귀 기울이고 냄새 맡으면 거기엔 교향악적 디테일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서, 그림이 숨을 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숨을 쉬는 그림. 관객이 풍부한 디테일(몸짓-마음짓)과 더불어 화가의 호흡까지 감지할 수 있을 때에 그림은 표면을 넘어선다. 그 순간에 나는 그림 안에 더 머무르면서 비로소 내 숨소리를 느낀다.
김수영씨 그림이 건물을 재현하고 있다고 전제하고서 그것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사람들이 웅성거리지만, 내 생각엔 아니다. 나는 그에게 여기가 어디요 라고 한 번쯤 물었는지는 몰라 도, 왜 건물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왜 건물을 그리느냐는 물음은 우문이다. 왠고 하니, 그리고 싶어서 그렸으니까. 왜 그리고 싶으냐고 묻는 물음은 더 어리석다. 왠고 하니, 그 물음은 이유를 먼저 대라고, 다시 말해 씨나리오를 먼저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셈인데, 어디 몸이 민감한 예술가가 씨나리오 따라서 작업을 한다든? 육신이, 감感이 앞서서 사고치는 것이 지, 짐승처럼. 그, 앞서 치는 사고를 사실은 작가 자신도 말릴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그가 그 건물을 겪어가는, 그리고 건물 그리기를 통하여 ‘그림을 살아가는’ 태세이다. 그림 그리기를 통하여 주체를, 그의 언어를 표현주의적 너스레와 더불어 휘두름으로써 도 리어 스스로를 해소하는 대신, 자기자신이 그림이 되어감으로써 그림을 세우고, 화가는 다만 그림과 세상이 통하는 문지방에 우두커니 서서 두리번거릴 뿐이다. 저 머언 4세기에 도연명陶淵明씨가 그러잖든―“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 한 송이 따 그윽한 향기 맡으며, 아득한 심정으로 남산을 바랜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 그 순간에 풍경은 짙은 안개 속에서 희부 윰하게, 아주 천천히, 번져온다. 겨우.
김학량(작가, 전시기획자, 동덕여대 전임강사)

김수영(1971-)은 서울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후 독일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2년 독일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가진 이후로 국내외의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고 있으며 최근 UBS 컬렉션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현재 서울에 작업실을 두고 있다. 김수영은 회화작가로 도시의 건축물을 그린다. 작가의 작품은 건축물의 외관을 묘사하는데, 전경과 배경의 구분없이 건축물의 외관을 이루는 유리창, 벽과 같은 동일한 요소가 무한히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구조를 보여준다. 화면을 가득히 채운 작가의 건축 회화는 건축물의 외관을 묘사한 구상이기도 하면서, 선과 면이 반복되는 기하학적인 추상으로도 읽힌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교란하는 작가의 작품은 소재보다는 회화의 조형성 자체를 주목하게 하는 특징을 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