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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젊은 작가 그리고 젊은 기획자가 마주한 어려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점은 아마도 미술계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객관적인 비평적 잣대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좋은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기준을 스스로 세워 나가야 하는 동시에, 그 답을 찾아나가는 것 역시 온전히 개인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단색화, 1980년대 민중미술, 이후 다양한 그룹 운동 등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일시적이었다 하더라도 작가들이 직접 모여서 만든 그룹운동이 일종의 흐름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큰 틀에서 하나의 그룹에 속한 작가들은 동일한 이상을 쫓고 있었다. 반면,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한 분위기 속에서 많은 젊은 작가들은 그룹을 형성하는 것 자체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각기 정의하는 ‘좋은 미술’이 개인마다 제각각이다. 하나의 그룹 활동이 아닌 개별 움직임의 경우, 작가들이 직면하는 가장 큰 어려움은 아마도 복잡다단한 양상을 띠는 동시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주목 받는 것이 더 힘들어지고, 더 나아가 개별 작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 없을 수 있다는 데 있다. 하루에도 몇십, 몇백 개의 전시가 열리는 오늘날, 전체 개최되는 전시 중에 10% 정도도 다 보지 못할 정도로 전시는 끊임없이 열린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개별 작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누군가가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의미는 만들어지지 않으며, 그것의 진가를 발휘할 기회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룰즈> 기획하게 계기

 

<룰즈>전을 통해 기획자인 내가 궁금했던 것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20-30대 젊은 작가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공통적인 특성이 있을까 하는 질문과,  또 다른 하나는 추상 회화의 실험 연속성 상에서 나타나는 이전 세대 작가 작품과 차별화된 특성은 무엇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런 궁금증을 품은 신진기획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주고 또한 전시 기회를 제공해 준 원앤제이갤러리 덕분에, 생각은 현실이 되었다.

지난 2년 여의 시간동안 수많은 신생공간이 생겼다가 사라졌으며,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올해 초 이같은 신생공간을 한 자리에 모은 전시 <서울 바벨>(2016.1.19.~4,5)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 전시는 공간과 세대에 관한 이야기로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표명해 온 신생공간을 한 데 모았다. <서울 바벨>이 개별 공간의 성격을 드러내고, 생존의 차원에서 젊은 작가들을 소개했다면, <룰즈>에서는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성에 주목해 동 세대의 작가들의 경향을 살피고자 했다. 더 나아가 매체의 제약없이 다양한 실험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고 있는 작금의 상황 속에서, 회화라는 매체적 한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지속적으로 새로움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싶었다.

주변 젊은 회화 작가들 중에 형태나 색채의 구성으로 추상적 화면처럼 쉽게 인지되는 작품을 제작하는 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같은 현상을 먼저 직시하고, 기획을 떠올리게 됐으며, 이전 세대의 추상 미술과 유사점이 있다면 무엇이며, 또 어떤 점에서 새로운지 비교해보고, 더 나아가 위에서 말한 현상의 원인을 찾고 싶었다. 가장 먼저 손쉽게 세워볼 수 있는 가설은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 등의 변화된 환경 속에서 제작 방식이 변했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가설은 다른 세대가 20대를 규정하는 한가지 방식인 세대론 프레임, “88만원 세대”로 20대를 보는 방식이었다.

이들 작품의 경향을 손쉽게 ‘추상’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이 단어를 쓰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다. ‘추상’이라는 단어에 수많은 미술사적 의미와 과거의 잔재들이 붙어 있고, 일부 작품에서는 ‘구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법한 이미지가 의도에 따라 활용되고 있기 때문에, 전시 출품작에 드러나는 시도를 지칭할만한 새로운 용어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출품작을 굳이 분류한다면, 추상과 구상, 그 경계에 있다고 보는 것이 아마도 가장 현상에 가까울 듯하며, 이같은 경향을 손쉽게 지칭하기 위해 ‘비재현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룰즈> 참여작가 7명의 작품 특성

 

전시에는 1980~90년대 출생의 젊은 회화 작가들 중 ‘비재현적’ 경향을 나타내는 작가 7명을 초청했다. 2015년 12월 부터 2016년 2월까지 3개월 여의 시간 동안 다양한 경로로 작가들을 만나고, 또 소개받았다. 참여작가 대부분은 지극히 우연하게 만났고, 매우 주관적으로 결정했다. 전체 전시의 키워드는 ‘규칙(Rules)’이다.  출품작 거의 대부분이 특정 사회정치적 이슈나 이야기에서는 어느 정도의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며, 작품 바깥의 삶과의 직접적인 연관관계보다는 작품을 구성하는 물리적 재료와 작가 사이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파열음 그 자체에 집중한다. 전시에는 명료한 선과 색으로 차가운 화면을 만들어 내는 작품부터 작가의 주관에 따른 감정 표출을 극대화한 작품까지 그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전시 제목 ‘룰즈(rules)’는 참여 작가 모두가 자신이 온전히 ‘통치(rules)’할 수 있는 세계 속에서 자신만의 ‘규칙(rules)’을 고수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붙였다. 보통 규칙은 여러 사람이 같이 지키기로 작정한 법칙이자 질서를 의미하지만, 전시에서 지시하는 각 작가들의 ‘규칙’은 지극히 각 개인에게만 해당되며, 그 규칙을 명확하게 남에게 설명하거나 공표할 이유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규칙이라는 단어의 원래 뜻과는 차이가 있다. 작가들이 제시하는 자못 객관적이고 명확해 보이는 규칙마저 실상은 그 목적이 지극히 불투명하고 자의적이다.

참여작가 7인의 작업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1. 감정이나 경험을 시각화하는 경우(김미영, 최수인, 에이메이 카네야마), 2. 회화 구성요소(색, 선, 형태, 재료) 그 자체의 실험에 집중하는 경우(이환희, 고근호, 성시경) 3. 그리고 회화 혹은 회화적 재료에 관한 회화(이상훈)를 제작하는 경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김미영은 캔버스 표면을 다른 차원으로 이어지는 이행의 통로로 상정하며, 청각, 미각, 촉각 등 과거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분위기나 기억의 파편을 캔버스 위에 그려내 공감각적 심상을 전달한다. 최수인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감정과 같은 심리적 양상을 다룬다. 특정 감각과 연관된 모티프를 구체화하여 특정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극적 무대를 창조해 낸다. 에이메이 카네야마는 꿈, 기억, 무의식에 축적된 이미지를 화면 위에 담는다. 물감과 붓, 캔버스를 마주한 작가 개인이 조우하는 그 순간의 수행의 행위에 의의를 둔다. 이환희는 재료, 색, 선, 형태 등을 결정하는 순간에 작품이 제작되는 시점의 개인적 관심사를 기반으로 만든 스스로의 규칙을 따른다. 고근호는 참조의 대상을 오직 회화 내부 요소에서만 가져와 작품을 제작하고, 그것들을 최종적으로 배열하는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성시경은 ‘화면의 면적, 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해 캔버스 안에서 여러 조각의 독립된 화면을 만들고, 확장 혹은 연결의 방법을 통해 얻은 틀 안에서 또 다시 개별적인 단위를 중첩해 하나의 화면을 완성한다. 이상훈이 작품에서 다루는 주제는 회화 그 자체다. 색상, 윤곽 등 회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각 작품의 주제가 되는데, 예를 들어 하나의 물감을 구성하는 여러 피그먼트를 일종의 도식처럼 이미지로 풀어낸다.

앞서 세웠던 두 가지 가설(인터넷의 사용, 세대론)은 작가들과 대면하고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시간 동안 깨어지는 과정을 겪었다. 작가들 대부분이 인터넷이나 컴퓨터 툴을 활용해 작품을 제작하고 있지 않았으며, 인터넷의 영향을 받는 것을 오히려 상당히 꺼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개인이 처한 현실적 상황이나 삶의 방식과 작품의 내용을 연결시켜 작품을 이해하는 것에 거부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일부 작품의 색 사용, 형태의 배치 방식 등에서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샵과 같은 툴을 쓰는 방식과 일견 비슷해 보이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기는 했다. 그러나 작가들은 전통적 회화의 범주 내에서 자신의 작품이 받아들여지기 원했으며, 새로움에 관한 갈망이 컸다. 기획자로서 발견한 한 가지 공통적인 특성은 작가들이 자신의 삶과 작품의 영역을 분리하려는 태도였는데, 이들 모두는 회화 작품이라는 자신이 만든 세계에 푹 빠져있는 듯 보였다. 어느 회화 작가가 그렇지 않겠냐마는, 화면 내에서 다루는 외재적 대상이나 언어화하기 쉬운 특정 주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고립돼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사회정치적 이슈나 특정 내러티브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형태이기 때문에 외부세계와 단절된 세상 안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작가들은 개인의 차원에서 즉각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실현가능한 형태의 소규모 유토피아를 만들고 있었다. 혹은 마치 하나의 게임적 가상현실 속에서 유희적 태도로 온전한 창작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듯보였다. 그 곳에서 이들은 개인에게 주어진 자유와 해방감을 마음껏 누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작품이라는 스스로가 만든 가상의 공간 안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자신이 만든 규칙대로 그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규칙

 

전시의 제목처럼, 기획자인 나 역시도 어떤 규칙을 갖고 전시에 임했다. 작가들의 규칙이 자신만의 내부 세계로 더 깊이 들어가야 발견가능한 어떤 것이었다면, 나의 규칙은 미술 바깥, 현실로 뻗어나가는 종류의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규칙은 “모두가 행복하게 일하는 것”이었다. 각기 다른 섬처럼 곳곳에 숨어있던 일곱 가지의 세계를 찾기 위해 돌아다녔고, 그들을 한자리에 모으기 위해 설득했고, 이 전시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수차례 공간 디렉터들 앞에서 전시의 의도를 설명했다. 공간 구성시에는 참여 작가들의 작품이 가장 먼저, 잘 보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작가들이 전시를 통해 소모된다는 느낌을 받거나, 실질적인 진행에 있어서도 정보의 위계가 있어 소외된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준비과정을 투명하게 공유했다. 소위 말하는 ‘제도권’ 공간에서 처음 전시하는 작가 네 명의 입장을 고려해, 디스플레이에 있어서도 기획자의 개입이나 해석의 방식보다도 작가의 의견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또한 이번 전시의 중요한 조력자인 협력기획자 이경민 큐레이터와 윤지수 디자이너, 이 둘과는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그들이 개입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두고, 유동적인 의사결정을 했다. 의견이 대립되는 때에는 최대한 협의하고 중재하여 최고가 아니더라도 최선의 합의점을 찾아내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점은 꽤 있다. 기획자는 끊임없이 전시라는 상황을 통해 어떤 이론적 맥락이나 키워드를 제시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세부 카테고리를 나눠 언어화하고 요약하는 일을 한다. 하지만 전시를 통한 맥락화에는 항상 허점이 존재한다. 작품의 내용이 한두가지 키워드로 요약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동시에, 사람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함께 활동하는 작가의 작품 특성을 규정하려는 시도 자체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한계가 명확히 보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벌인 이유를 찾는다면, 난해한 양상을 띠는 동시대미술의 이해를 조금이나마 돕기 위해서일테다.

누군가는 이미 수년 전에 회화의 종말을 말하기도 했지만, 아직도 꽤나 건재하다. 어쩌면 지금까지 항상 있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쭉 그럴지도 모르겠다. 평면회화라는 매체적 제약 안에서 새로운 실험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일 것인지, 꾸준히 고민하고 있는 작가들은 이 전시의 참여작가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들의 작품을 앞으로도 좀 더 오랫동안, 천천히 지켜보고 싶다.